누에가 밥을 먹으면 비가 내린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나 어릴 적에 외가댁에서는 돈 되는 일이라면 대부분 손을 댔었다. 논농사 밭농사는 물론이고 담배도 키웠다. 양잠도 그중 하나였다. 외가댁 뒷마당을 넘어가면 검은색 비닐로 덮어둔 큰 하우스 세 동이 있었다. 안에는 대나무로 얽어맨 틀이 어렸던 내 키를 넘길 정도로 높다랗게 늘어서 있었다. 틀에는 기다랗게 잘린 뽕나무 가지가 가득했다. 뽕잎마다 누에가 가득 앉아 있었는데, 연신 머리를 움직이며 뽕잎을 갉았다. 하우스 안에서는 비가 오듯이 귀를 간질이는 소리가 계속 울렸는데, 누에가 뽕잎을 갉는 소리였다.
털이 수북한 송충이를 보면 눈이 찌푸려지기 일쑤지만, 누에는 그렇지 않다. 젖빛의 몸통은 연한 키틴질로 덮여 있어 만져보면 제법 부드럽다. 원통형의 몸은 통통해서 만지는 재미도 좋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면 몸을 움직여 먹을 것을 찾는 한창 크는 아기와 다를 것이 없다. 처음 뽕잎에 오른 누에가 며칠 동안 먹어대며 지방질을 쌓고 나면 먹기를 줄이고 잠을 자기 시작한다. 이것을 최면기라고 하는데, 이내 실을 토해 몸을 고정하고 고개만 들고 자기 시작한다. 기잠이 도착한 것이다. 자고 먹기를 반복하면 탈피를 하는데, ‘일령’이라고도 하고 ‘한 잠잤다’고도 한다. 다섯 잠을 자고 나면 옛날 시골 방문 쪽 같은 틀 칸마다 넣어주면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시작한다. 나방이 되기 전에 고치가 되는 것이다. 누에가 이렇게 자라는 걸 보면 사람의 배움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누구든 어릴 때면 뭐든지 왕성하다. 먹기도 놀기도 배우기도 왕성하다 못해 지칠 줄 모른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이 사람도 이 시기에는 닥치는 대로 넣어야 한다. 그것이 나쁜 것일지라도 좋은 것일지라도 머리에 집어넣어야. 재주가 빛날 수 있다. 머리에 넣고 또 넣다 보면 사색에 잠기고 회의감이 찾아온다. 지금까지 넣었던 것들이 싱거워지고 새로운 것을 봐도 흥미보단 권태로움을 느낀다. 여기서 어떤 이는 현실에 눈을 뜨고 다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철학이나 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배움을 멈추고 사색만 남는다. 사람의 최면기랄까? 최면기를 반복해 쌓은 배움과 경험을 다듬기도 한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반복하다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고 고치까지 가지는 못한다. 고치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소리다. 매번 잠을 충실히 자기 위해 채우고 사색하길 반복하는 것은 그 배움과 사색을 바탕으로 이제와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충실한 고치가 되기 위해서는 충실하게 쌓고 가다듬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고치를 나와 경지에 오른 그 무엇이 된다.
누군가는 한 잠자고 만족했다며 어른이라 자처하고 누군가는 고치까지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순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몇 잠을 잤는가. 고치가 되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오늘의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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