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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정리-신분당선에서 눈치 싸움을 했다.

유현채의 스피치 랩 2024. 10. 30. 10:40

대전에서 태어나 27년을 살았다.

 

대전에는 지하철이 없다 보니 선로를 달리는 물건이라곤 기차만 봤었는데 서울에서는 땅 밑으로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지하철은 자취방을 구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렇게 서울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약 열 두해를 살았다. 그리고 여섯 번의 봄을 경기도에서 맞이했다.

 

경기도 중에서 고른 서식지는 용인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지정학적 위치가 묘한데, 서울을 가면 '아 나는 경기도 사람이구나' 싶고 지하철을 타면 '서울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싶다. 신분당선 때문이다. 신분당선 지하철을 타면 동내에서 강남역까지 넉넉히 40분이면 충분하다. 요금은 비싸지만, 용인에 살기를 잘 했구나 싶을 정도로 만족하는 점이다. 심지어 신분당선은 최근에 만들어져서 환경이 좋다. 역사와 열차 모두 깨끗하다. 강북에 살 때 주로 타던 1, 4, 5호선과는 다르다.

나는 신분당선 성복역 근처에 살고 있다. 성복역은 신분당 노선 중에서 비교적으로 끝에 있다. 두 정거장만 가면 종점이다. 순서가 이렇다 보니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 앉을 자리가 넉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입주가 시작된 근처 대단지 아파트 때문인지 앉아가기 점점 어려워졌다. 성복역에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었다. 이어서 세 번의 기회가 왔는데, 미금과 정자역 그리고 판교역이 그곳이었다.

‘미금, 정자역’은 분당선 환승역이라서 많은 사람이 내리고 탄다. 빈자리가 생기는 절호의 기회다. 판교역은 환승역은 아니지만, 판교로 출근하는 직장인이 많다 보니 내리는 사람이 제법 많은 곳이다. 그러니 미금과 정자역, 그리고 판교역에서는 눈치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눈치싸움은 판교역에서 절정에 이른다. 다음 역인 청계산까지는 거리가 상당한데다, 청계산 다음에는 대부분의 승객이 내리는 양재와 강남역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해온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눈치싸움만 잘 한다면, 편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아? 눈치싸움이 뭐냐고? 이런 말이다.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서 옆 사람과 눈치를 나누기"

 

 

 

OECD 국가 중 일을 오래 하기로는 1등을 먹고도 남을 우리나라 직장인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순간이라면 아무래도 지하철에서 앉아가는 때가 아닐까? 모자란 잠을 잘 수 있고 게임이나 책을 읽을 수도 있고 항문 건강을 위해 케겔운동을 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건 젊건 만원 지하철에서 한가롭게 앉아 출근한다면 운이 좋구나 싶어 하루가 즐거울 수도 있다. 그렇게 좋은 앉아가기를 나 혼자만 꿈꾸면 좋으련만 세상일이 그런가? 내가 생각하는 건 남들도 생각한다. 그러니 눈치싸움이 일어난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금과 정자 판교, 세 번의 기회를 붙잡을 눈치싸움을 시작했다.

눈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첫째, 대상을 살펴야 한다. 나이와 성별 복장과 짐, 그리고 행동 등을 살피며 미금이나 정자, 판교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다. 미금이나 정자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다. 목적과 넓어 직업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두 번은 도박하듯이 찍는다. 감을 믿는 것이다. 예컨대 의자에 깊숙이 앉지 않은 사람 들이다. 판교는 IT 회사가 많다. 그러니 IT 업종에서 일할 것 같은 사람을 특정하면 된다. 정장을 말끔히 입은 사람은 일단 제외다. 편견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IT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히 세팅된 수트 차림을 하지 않는다. 수트 차림을 해도 어딘가 빼먹거나, 어색하다. 옷은 잘 입었는데 머리를 매만지지 않거나, 재킷 단추를 다 채운다든지, 셔츠 안에 내의를 입는다든지, 이런 사람은 제외다. 편안한 복장인데 그렇다고 학생은 아닌 것 같은 사람도 대상이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수트 입은 사람은 젖혀두고 가볍게 입은 사람을 찾는다. 아내가 표본이다. IT 회사에서 일하지만, 가볍고 젊게 입고 다닌다. 또래인데 보수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과는 복장은 물론 화장도 다르다. 그다음은 모바일 게임이나, 유튜브를 보는 사람을 찾는다. 판교에는 게임회사가 많다. 콘텐츠 기반의 회사도 많고 그 회사들을 위한 회사도 많다. 유튜브를 보는 사람도 대상이다.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이니 관련 직종에 근무한다고 보는 거다. 너무 1차원 적인 생각이라고 하지 말기를...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헷갈리기만 한다. 복잡하게 생각해 봐야 정신력만 낭비한다. 골라낸 사람을 보며 좌우도 살핀다. 내가 고른 사람이 오히려 꽝일 수 있다. 편안한 좌석 이용권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두 사람을 고른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내가 고른 사람을 포함해 옆에 앉은 사람까지다. 그래서 고른 사람 앞에 서 있을 때는 그 앞에 바로 서지 않고 두 사람의 중간에 선다. 그래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내려도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렇게까지 해서 앉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물론이다. 나는 자리만 보면 앉고 싶은 욕망에 지배당하는 아재니까.

지하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수트 입은 사람을 제외하고, 어쩐지 강남에서 내릴 것 같은 사람 제외하고, 게임을 즐기면서 자유분방한 차림새 그리고 회사에 다닐 것 같은 액면가인 사람을 추려낸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사람 앞에 선다. 혹시 모르니 목표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다시 살핀다. 앳된 얼굴에서 실무진의 느낌이 풍겼다. ​

 

 

"그때였다"

 

 

 

내 곁에서 서있는 사람이 내 쪽으로 간격을 좁히며 신경전을 걸어왔다. 상대 눈치를 살피니 그도 자리에 앉고 싶은 모양이다. 양손에 든 가방과 적당히 나이 든 얼굴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밀릴 내가 아니다. 내 키는 180cm 몸무게는 96kg 웬만한 남자와의 몸싸움에도 지지 않는다. 아니 질 수 없었다. ​

앉아 있던 여성이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을 본다는 건 지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일 테고 곧 내릴 수 있다는 소리다.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분명히 내린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강남까지 나를 편안하게 모실 자리를 내게 인도해 주리라! 그녀의 모든 몸집은 내리기 위한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미금과 정자를 지났지만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판교가 분명했다. 내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이 여자는 점점 몸치장을 점검했고 핸드백을 더 자주 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경쟁자도 확신이 섰는지, 내 곁으로 더 바싹 붙었다. 눈앞에 놓인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나는 허벅지에 힘을 줬다. 경기에 이기기 위해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태도로 눈치싸움에 임했다. 나는 그 순간 눈치싸움 천재 강백호가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번 역은 판교, 판교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내리려고 들썩이는 사람들로 분주해진 열차는 천천히 판교역에 진입했다. 차 안은 내리는 사람과 빈자리에 앉는 사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재빨리 자리를 낚아채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이 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나 역시 내 자리에 앉을 움직임을 시작했다. 어깨에 멘 가방을 내리고 '이제 내가 앉을 거요 몸짓'으로 다가갔다. 약 0.1톤을 버티느라 비명을 지르는 내 다리에게 안식을 줄 그 여자를 보았다.

 

 

"문이 닫힙니다."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하철 일곱 좌석에 앉은 사람들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였다. 좋은 패를 잡았다고 대박을 꿈 갔지만 기대만큼 좌절감이 찾아왔다. 마치 자리에 당장 앉을 것처럼 움직이던 내 몸짓은 뻘쭘함으로 치환되었다. 강남까지 편히 가려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여자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백에서 태블릿을 꺼내 뭔가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