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정리-불쾌한 학습지

불쾌한 학습지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광고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성우가 되라며(일전에 쓴 정말 사기 광고는 아님) 현직 성우가 만든 학습지(방법론과 캐릭터 분석, 훈련법 등)를 통해 공부하고, 성우로 활동하며 돈을 벌라는 광고였습니다.

 

광고는 '아무런 준비 없이 8주 후면 성우로 데뷔할 수 있다'라고 헤드 카피를 써놨고, 티빙과 왓챠 등에 데뷔할 수 있는 기회(오디션이겠지..)를 준다고 조그맣게 적어놨더군요.

 

 

우리나라 성우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방송사 전속 시험에 합격해 전속 기간을 거쳐 협회에 등록된 '협회 성우'와 전속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실력이 출중해 성우로 일을 하는 '비협회 성우'가 그것입니다. 둘의 큰 차이라면 협회 성우는 협회 성우에 준하는 몸값을 받을 수 있고, 지상파나 케이블 등에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반면에 비협회성우는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 등에서 목소리를 들려줄 기회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애초에 기회를 받기 어려우니..) 다른 차이는 몸값입니다. 비협회 성우는 광고 녹음을 5,000원에 일한다는 사람도 등장했는데, 협회 성우는 최소한의 몸값을 보장받습니다. (보장받는다 했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아니다)

 

 

협회 성우가 되기까지는 난관이 많아요.

모든 방송사가 성우를 뽑지는 않습니다. MBC는 성우실을 없앤지 오래며, SBS도 별도의 성우를 채용하지 않습니다.성우 선발을 하는 곳은 KBS, EBS, 챔프, 투니버스 등이 있습니다. 심지어 시험은 매년 열리지 않습니다.(과거에 KBS는 매년 시험이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KBS 1차 시험은 KBS 별관 1층에 모여, 위층으로 올라가 시험이 진행 됩니다.(지금은 오디오 CD 제출로 바뀐 걸로 압니다.) 1차 시험에 걸리는 시간은 단 1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보통 5천 명 정도가 운집해서 열명 남짓 합격하죠.

 

우리나라에서 성우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장이 작은데다 소위 고인물 성우들이 대부분의 역할을 맡고(성우는 딱히 정년이 없습니다.) 수요가 창출되지 못하는데 성우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망생은 경험삼겠다고 돈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일하기도 합니다. 어떤 PD들은 그걸 알고 이용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성우 시험에 합격하면 꽃길을 걷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협회 성우가 된다고 한다고 해서 일거리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수준 높은 일을 할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최소한 '이 정도 몸값은 받아라'는 가이드가 따라오고 말입니다. 심지어 협회성우이면서 비협회 성우만큼 혹은 덜 받고 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협회 성우는 몸값을 싸게 받을 수 있으니,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우 시장의 악재는 또 있습니다.

성우 시장은 사양 산업을 넘어 사라지는 시장입니다. AI 발달로 사람의 목소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죠. AI 기술이 고도화되어, 고인의 목소리도 계속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역을 맡은 배우 제임스 얼 존스입니다. 그는 2024년 9월 9일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냉정하게 우리 나라 성우시장은 전혀 밝지 않습니다. 전속 시험 기회는 더 축소되고 있고, 시장의 규모는 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현재 성우 인력으로 충분한 상황에 신인 발굴에 신경쓸 리는 만무하지요. 그렇다고 비협회 성우로 활동하면 경제적으로 괜찮은가? 제가 2007년 부터 비협회 성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본업은 따로 있습니다. 성우 일로만 먹고 살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말입니다.

 

시장 상황이 이런데, 학습지 콘텐츠로 성우가 되어 잘 먹고 잘 살라?는 광고를 보니 쓴웃음을 넘어 화가 나더군요. 이거야말로 '멋모르는 이 등 처먹는 꼴' 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이런 광고에 현혹되어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협회 성우도 일이 없어 쿠팡 배송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