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정리-우울감의 원인은 보통 가까운 곳에 있다.
내 우울감의 범인은 나였다.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지 말라’를 품고 살았던 때가 있다. 타지인 서울에서 어떻게든 잘 해보겠다며, 열정을 불태웠을 때다. 열정과 좌절감은 동전의 양면 같은 사이인 건지 열정만큼 우울하기도 했다.
나는 삼포세대였다. 월세방을 전전했고, 연봉은 보잘것없었으며, 가진 것도 물려받을 것도 없었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며 이별의 화살을 맞았고, 90%가량 운에 기대야 했던 공부는 끝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은 누더기가 되었다. 걱정에 잠을 못 잤고, 회사에서는 몽롱한 상태로 실수를 연발했다. 지금에야 그 시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노라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자살 충동과도 싸울 정도로 심각했다. 최소한 남 만큼은 해내야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관대해 지지 말라며' 채찍질을 했다. 강하게 살겠다고 세운 좌우명이 나를 괴롭혔다.
서른을 목전에 최소한 밥은 먹고살고 싶다는 생각에 성우의 꿈을 놓았다. 직장에 다시 들어간 나는 디지털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다. 이글루스 베스트 블로거로 살았던(그래 양보해서 요즘 말로 인플루언서라 치자) 경험을 밑천으로 일했다.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한계는 금세 드러났다. 디지털 마케팅 초창기였는데, 개발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 말과 글로만 살아온 내게는 힘든 언덕이었다. 상사는 개발자 출신의 마케터였고 동료는 디자이너 출신의 마케터였다. 생각한 걸 현실화할 수 있는 그들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작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Grid 책이나, 개발 기초 책을 펼쳐봤다. 말을 알아듣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목표를 세웠다. 스스로에 관대해지지 말고 미친 듯이 해야 된다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단 일주일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곤 .'이것도 못 해내는 너는 모자란 인간이라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지 말고 노오오오오력해'라며 자학했다. 머리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우울해지니 잠을 잘 수 없었고, 뜬 눈으로 온라인 게시판에 나 같은 건 나가 죽어야 한다며 찌질이는 글을 싸질렀다. 그때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네 생각대로 네가 부족한 인간이면, 누가 너랑 일하려고 하겠니, 그보다는 네가 잘 하는 분야가 분명히 있으니까 너랑 일을 하는 거지, 너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의 장점을 보려 하지 않아"
회사는, 조직의 일원은 완전체가 아니다. 서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부족함을 서로가 메운다. 다만 그건 당연한 거고 더 잘해야 한다며 자학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지 말라'는 버렸다. 내가 잘하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후회를 남기지 말자며 다짐했다. 무식하게 혼자만 다 감당하려던 심보를 내려놓았다. 삶은 혼자 보다 함께 가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응원해 줄 사람을 사귀고 나도 그를 응원하고 그들에게 배우고 나도 도움을 주며 성장하기를 익혔다.
직업상 20대 사회 초년생들을 만날 기회가 잦다. 어두운 안색으로 내 앞에 앉은 그들 속에서 과거의 나를 볼 때가 있다. 삶의 굴레를 홀로 다 짊어진 낯빛, 몇 마디 말만으로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그들은 그 짐을 친구는 커녕 가족과도 나누지 않고 홀로 싸웠다. 얼굴에 생기가 없어질 때까지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와 내 경험이었다.
말을 잘하고 싶다며 찾아온 이들의 상당수는 어두운 심리 상태를 가졌다. 자신을 책망하고, 능력 없다고 규정하는 그들의 말은 힘이 없거나 눈치를 보는 듯하거나,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우선 마음부터 챙겨야 한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사랑해 줘야 한다. 그래야 말에 힘이 생긴다. 자신감 없는 말을 하는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외치자 '나는 잘하고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