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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정리-성적이, 진로를 결정할 때 발목을 잡지 않도록...

유현채의 스피치 랩 2024. 11. 16. 07:29

 

담당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표정에는 난감한 기색이 짙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내게 전했다.

'사회자님 혹시 영어로 진행 되세요?'

술 마시는데 쓰는 영어라면 모를까,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영어는 할 줄을 몰랐다. 할 수 있다고 허풍 치기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니 단호하게 '아뇨'라고 답했다. '적당히 번역기 돌려서 문장 만들어 하면 될 텐데'라는 생각에 서둘러 파파고를 부를 생각을 하고, '적당히 문장 만들어서 하는 건 됩니다'라고 담당자에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기각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나는 주말이면 기업행사나 결혼식 전문 사회자로 변신한다.  행사장에서 활약한지는 10년이 넘었다. 인연을 맺은 커플은 1천 쌍이 넘었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 미국식 피로연 파티를 겸한 결혼식의 사회를 맡았다. 피로연까지 의뢰를 받았던 터라 외국인이 섞여있는 결혼식인가 싶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상황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신랑 신부가 모두 한국인이었지만, 신랑은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편한 모양이었다. 우리말로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복잡한 구조의 문장을 말할 때는 영어로 말했으니까. 하객의 50% 정도는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미국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예식장 스태프들도 그 점까지는 예상하질 못해서, 갑작스레 영어로 진행할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원어민은 커녕 토익점수도 없고, 술과 함께 친구 사귀는 영어는 할 수 있어도 비즈니스 영어는 고자인 내가 어설픈 영어로 행사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못한다고 할 수 밖에.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해놓고 돌아서니 마음이 찝찝했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피로연 파티장으로 자리를 옮기니 가벼운 영어로 진행해도 문제가 없던 분위기라서 더욱 아쉬웠다. 자존심이 생했다.  남 앞에서 떠들기로는 잘났다고 생각하는 내가 못한다고 해버리단. 어쩌겠나 남들 공부할 때 침 흘리며 자던 나를 탓해야지.

몇 해 전 영화 기생충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회자된 인터뷰 영상이 있었다.

조연으로 출연한 이정은 배우의 인터뷰였다.  외국 매체와의 인터뷰였는데, 통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은 배우는 수준 높은 영어로 질문에 대답했다.  나중에 전해진 사실은 그녀는 언젠가 올 기회에 대비해 차근히 영어 공부를 해두었다고 한다.  조연배우로써 탄탄한 입지를 다진 그녀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기회와 마주했고, 준비한 역량을 뽐냈다.  사람들은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토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진지하게 글을 쓰면서 마주하는 치부가 있다. 아무리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가도 어릴 적 국어시간에 쌓아야 했던 기본기가 부족한 사실이다.  알면 알 수록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는 달랐다. 알면 알 수록 게으른 자신의 민낯을 봐야 했으니까. 만약에 내가, 시간을 준비하는데 썼다면 '영어도 되는 사회자'로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음 기회를 위해 쌓는 수밖에 내가 자존심 상한 건 아무래도 내가 헛된 시간을 보냈다는 데 있었나 보다. 그래서 누군가 수험생에게 전한 이 말이 울림이 남다르지 않더라

 

"성적이 나중에 네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진로를 결정할 때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한다"